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전 서울예대 교수)
가파른 벼랑 밑으로 물이 흐른다.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인다.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바위가 물 위로 솟았고 수초는 무성하다. 물새 소리가 들린다. 한 선비가 넓적 바위 위에 두 팔로 턱을 괴고 엎드려 물을 바라본다. 미소 짓는 눈과 짙은 눈썹, 넓은 이마와 둥근 코, 인자한 입과 긴 수염, 그리고 동여맨 머리. 선비는 물을 바라본다. 옅은 미소가 입가에 퍼진다.
인제 강희안(1417-1464)이 그린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이다. 제목을 풀면 ‘고결한 선비가 물을 바라본다’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물 이야기가 나온다.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모든 것을 섬길 뿐이다. 그것들과 다투지 않는다. 모두가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흐를 뿐이다. 그래서 물은 도에 가장 가깝다(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또한 공자는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고 했다. 노자의 물과 공자의 물은 같다. 가장 선하고 가장 지혜로운 것이 물이다. 고사관수도는 바로 이러한 물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서양 그림 중에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 있다.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나르키소스(나르시스)의 사랑’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한낮에 사냥하다 지친 나르키소스는 물을 마시러 숲속의 샘으로 왔다. 물을 마시던 그는 물에 비친 아름다운 모습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도취된 것이다. 그 모습을 잡으려고 물에 손을 댔더니 이내 사라졌다. 또다시 물에 손을 댔다. 또다시 사라졌다. 계속 반복했고 계속 사라졌다. 나르키소스는 그 안타까움에 끝내는 병이 들어 죽고 말았다. 죽은 자리에 한 송이 꽃이 피었다. 바로 그 꽃이 나아시서스(수선화)이다. 그래서 수선화 꽃말이 ‘자기 사랑’이다. 고사관수도에서 선비가 물을 바라보는 것과 나르키소스가 물을 바라보는 것은 다르다. 앞의 것은 자신을 비운 모습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반면에 뒤의 것은 자신에 집착한 모습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든다. 필자는 ‘고사관수도’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 그림엽서를 구해 필자의 연구실 책꽂이에 세워 놓았었다. 마음이 들떠 있을 때 바라보면 흥분된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강희안의 고사관수도가 주는 묘미다.
강희안은 조선 전기의 화가로 세종 때 학문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직제학을 지냈다. 또한 시서화에 뛰어나 ‘삼절’이라 불렸다. 강희안이 죽고 나서 작성한 행장을 보면 그의 삶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행장은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다른 사람이 기록한 글이다. 다음은 행장의 내용이다. 강희안은 이미 두세 살 때 담장이나 벽에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에는 다시 학문 공부에 매진해 진사시에 합격하고 식년 문과에 급제해 돈녕부주부가 됐다. 그 후 예조 좌랑, 집현전 직제학, 이조 참의, 호조 참의, 황해도 관찰사, 가선대부, 인순 부윤까지 지냈다. 말년에는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크게 고초를 겪었다. 단종복위운동은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 등 사육신이 주동이 되어 복위를 시도했던 거사를 말한다. 수양대군은 나중에 세조가 돼 이 사건을 다시 철저히 조사해 관련자들을 처형했다. 강희안의 벗이었던 성삼문은 임금에게 간곡히 호소해 강희안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 후 강희안은 안타깝게 마흔여섯 살에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강희안의 문장과 문체 그리고 그림은 그 시대에 독보적이었다. 특히 문장이 뛰어나 용비어천가에 주석을 붙일 정도였다. 또한 집현전 시절에는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학사와 함께 훈민정음해례본을 만들어 한글 창제에 큰 공을 세웠다. 많은 사람이 강희안의 작품을 갖고 싶어 했다. 그러나 강희안은 자신의 작품이 세상에 전해지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글과 그림은 천한 재주다. 후세에 전해지면 내 이름을 욕되게 한다.” 강희안의 이런 유언 때문에 그의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