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창희 디지털산업정책연구소 소장
‘미디어’라는 단어를 두고 시끄럽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지만 지금처럼 많은 논란이 됐던 적이 있었나 싶다. 미디어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누군가는 미디어를 통해 의도적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해 이른바 탈진실(post truth)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그런가 하면 어디까지를 미디어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새로운 미디어가 계속 등장하고 있고 제공하는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정성, 신뢰성, 전문성을 기반으로 했던 레거시 미디어의 위상은 도전받고 있고, 미디어의 정체성과 범주에 대한 혼란은 명확해지기 어려워 보인다. 미디어는 흔들리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미디어의 필요성과 역할에 대해 되묻게 만든다. 원론적인 차원에서 “미디어란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고민에 직면했을 때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종종 다시 꺼내 보게 되는 책들과 최근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들을 펼쳐 보며 생각을 가다듬는 것이다.
미디어의 범주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소위 레거시 미디어라고 불리는 매스미디어, SNS와 같이 제작에 관여하지는 않지만 콘텐츠와 정보를 유통시키는 플랫폼, 그 이외에도 다양한 형태의 미디어들이 등장하고 있다. 매스미디어는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고 SNS와 같은 플랫폼도 중요하다. 매스미디어는 콘텐츠와 정보를 제공하고 플랫폼은 이를 유통시키면서 다양한 형태의 커뮤니케이션에 기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제임스 웹스터의 《관심의 시장》(백영민 옮김,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을 다시 펼쳐 본다. 지금과 같이 디지털화가 심화된 미디어 환경에 대해서는 낙관론과 비관론이 함께 존재한다. 웹스터는 낙관론자들은 새로운 참여 문화의 탄생을 기대하며, 비관론자들은 세상이 양극화될 것이라고 경계한다면서 어느 쪽의 손도 확실히 들어주지 않는다. 웹스터는 미디어가 동일성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어도 과거에 미디어가 사회통합의 기능을 수행해 왔다고 지적한다. 웹스터는 양극화에 대한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이용자가 공유할 수 있는 광범위한 문화적 영역이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새로운 공론장이 형성될 것이라고 얘기한다. 이와 같은 웹스터의 주장은 오랜 기간 미디어를 연구해 온 학자가 가진 선의에 근거한 바람일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미디어 연구자 입장에서 ‘미디어’는 고도화된 현대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미디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본적인 정보의 제공과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부작용이 많다고 해도 이미 수많은 이용자의 일상의 부분이 되어 있는 SNS 이용을 인위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대표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 ‘팬덤(fandom)’이다. 미디어 이용에 있어서나 정치 참여에 있어서나 팬덤이라는 개념이 주목받은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최근에는 과열된 팬덤에 대한 우려가 높지만 팬덤 자체는 긍정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다. 강신규는 《흔들리는 팬덤》(서울: 컬처룩)에서 팬덤이 과거 주변부에서 수동적이었던 수용자가 참여를 통해 특유의 문화를 창조해 나가는 주체가 되도록 만들어 준다고 지적한다(미디어 앞에 ‘흔들리는’을 수식어로 붙인 것은 강신규의 책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같은 책에서 강신규는 이용자가 미디어의 상업적 전략에 동원될 위험이 있다고 경계한다. 미디어를 대할 때 팬덤을 가지는 것 자체는 긍정적일 수 있지만 미디어를 통한 팬덤 형성이 가진 속성을 명확히 이해하고 접근할 필요가 있다.
미디어 소비와 미디어를 통한 고관여 정치 참여 등 미디어 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지만 미디어 이용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 확립과도 관련돼 있다. 리처드 로티는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김동식, 이유선 옮김, 고양: 사월의 책)에서 타인이 겪는 고통에 공감하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확립하고 있는 존재를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liberal ironist)라고 개념화한다. 로티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가 되기 위해 중요한 행위 중 하나로 영화와 TV 프로그램과 같은 미디어 이용을 꼽고 있다. 미디어 소비가 양극화를 조장한다는 비판이 많지만 상대방의 가치를 존중하되 나만의 고유한 관점을 획득하는 데 미디어 이용은 필수적이다. 로티가 문학과 함께 미디어 이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다양한 관점을 미디어를 통해 접하면서 감수성을 함양할 수 있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 이용이나 대인 간 교류를 위해 미디어는 필수재이며, 나만의 관점을 가지면서 상대방의 고유한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관점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미디어를 잘 이용할 필요가 있다.
양극화에 대한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지만 생면부지인 수많은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것도 미디어다. 미디어를 통해 지향성이나 취향이 유사한 이들과 강한 연결 관계를 맺을 수도 있지만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해 나가는 느슨한 연대도 중요하다. 1990년대부터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인 은희경은 2010년대를 전후로 발표한 몇몇 작품들에서 ‘고독의 연대’를 다루고 있다. “고독끼리의 친근과 오해의 연대 속에 류의 삶은 흘러갔다(<태연한 인생>. 파주: 창비, 265쪽).” 공동체 속에서 함께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고독으로 은유 될 수 있는 각자의 처지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러한 태도의 함양은 갈수록 중요한 덕목이 될 것이다. 이 또한 미디어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언론과 같은 정보 생산자는 양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고, 이용자도 현재의 미디어 환경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당장 주목받을 수 있는 기사나 콘텐츠를 내보내는 것이 당면 과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디어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생태계의 건전화를 위한 노력이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경쟁과 함께 수반될 필요가 있다. 나의 관점을 강화하는 편향적 이용이나 나의 관점을 강요하기보다는 다양한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미디어 이용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기다. 정부는 건전한 정보 생태계와 미디어를 통한 바람직한 연대를 유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규제가 답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현재의 상황을 잘 조율해 낼 수 있는 조정자로서의 정부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미디어는 필요하고 중요하다. 그런 미디어가 잘 작동해 나가기 위한 연대가 필요하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