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대우교수

정재영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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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들(Fictions) 》을 비롯해 세계적인 소설과 수필을 발표한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도서관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강했던 인물이다. 작가이자 20년 가까이 국립도서관장을 역임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의 도서관에 대한 사랑은 원초적인 것에 더 가까운 듯하다. 50세 후반에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도서관에서 책을 읽던 모습이 지금까지 사진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도서관에 대한 사랑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보르헤스는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서 ‘도서관은 무한한 우주이고, 책은 신’이라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천국이 있다면 그 모습은 도서관과 같을 것이다’란 말로 도서관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보르헤스의 말대로 도서관이 정말 ‘무한’의 공간이자 ‘천국’일까. 우선 단어들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무한’은 ‘수(數), 양(量), 공간, 시간 따위에 제한이나 한계가 없는 것’을, ‘천국’은 종교적 의미를 제외하면 ‘어떤 제약도 받지 않는 자유롭고 편안한 곳’을 의미한다.

공교롭게 ‘무한’과 ‘천국’은 제약이나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아마도 보르헤스는 도서관이 천국이자 무한한 공간이 되려면 ‘제약’과 ‘한계’가 없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현실로 돌아가 보자. 현재 겪고 있는 대학도서관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이 ‘제약(制約)’, 그리고 한계 즉, ‘유한(有限)’에 기인한다.

2009년 정부의 반값 등록금 정책이 시작된 지 16년이 지난 지금 대학의 재정 상황은 매우 열악하다. 예산 부족으로 긴축정책을 넘어 필수 예산과 인력까지 줄이고, 우수 교직원 채용은 물론 연구 및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조차 힘에 겨운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서관 자료에 대한 지원 규모도 축소돼 연구와 교육을 위해 가장 기본적인 주요 Web DB 구독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예산의 ‘제약’이 도서관의 역할을 어렵게 하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자료의 보존을 위한 공간의 경우 상황은 더 심각하다. 대학 당국에 증가하는 책을 소장할 장소와 정보를 기반으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활동을 위한 공간 확보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책을 버리고 그 공간을 활용하란 말이 뒤돌아 온다.

약 2000만 권을 소장하고 있는 하버드대학교 도서관을 비롯해 영미권에 1000만 권이 넘는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대학도서관이 수두룩하고, 아시아에서도 일본의 도쿄대학교 도서관이 900만 권, 중국 베이징대학교 도서관이 1800만 권을 갖추고 있지만 어느 도서관도 공간확보를 위해 장서를 대량으로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540만 권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도서관를 제외하고, 국내 대부분의 대학도서관이 기껏해야 100만 권 내외를 소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도서관의 공간 확보를 위해 장서 폐기가 가장 먼저 언급되는 국내 대학도서관의 현실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무한까지는 아니더라도 유한도 이런 궁핍한 유한이 없다.

대학의 심장이라는 도서관이 이런 대접을 받아서야 연구와 교육의 질이 어느 세월에 좋아지겠는가. 무한한 천국은 둘째치고 심장 수술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대학도서관에 대한 지원은 대학 전체에 활기와 생명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대학의 다양한 분야에 국가의 지원이 필요하지만 대학의 심장인 도서관에 대한 지원이 우선돼야 하는 이유다. 정부 지원을 통한 첨단 정보의 확보와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공간 제공은 대학의 교육과 연구의 질을 한 차원 높일 수 있는 것은 물론 국가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미 선진국의 많은 대학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도서관은 불을 환히 밝히고 고독하게, 그리고 무한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소중하고 ...... 비밀스러운 책들을 구비하고서 영원히 존속할 것이다. -보르헤스. 픽션들 : 바벨의 도서관-

이제라도 대학도서관이 ‘제약’과 ‘한계’를 극복하고 ‘무한한 천국’이 될 수 있기를,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천국을 볼 수 있기를, 이것이 상상으로 끝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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