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한 범 교수팀, 가계도만 보고 다양한 형질의 ‘유전 vs 환경’ 영향 완전 분해
[한국대학신문 이정환 기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한범 교수 연구팀이 수백만 원 드는 유전자 검사 없이도 가족들의 건강검진 결과만으로 키나 몸무게 같은 형질들의 유전적 특성을 분석할 수 있는 기술(BIGFAM)을 개발했다고 9일 발표했다. 기존 방법이 수백만 개의 SNP(단일염기다형성) 데이터를 필요로 했던 것과 달리, 이 기술은 가계도와 건강검진표만으로도 정확한 유전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지금까지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알아보려면 값비싼 유전자 검사가 필수였다. 유전자 검사비만 개인당 수십만 원에서 수백만 원, 가족 전체가 받으려면 몇백만 원이 들어간다. 연구 규모가 커질수록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 수만 명 규모의 대규모 코호트 연구에서는 유전자 검사 비용만으로도 수십억 원이 소요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비용 부담은 선진국의 대형 연구기관에서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발도상국이나 의료 자원이 제한된 기관, 지역 등에서는 아예 시도조차 어려웠다.
반면 세계 의료기관들은 이미 활용 가능한 방대한 보건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 매년 수백만 명이 받는 건강검진에서 나오는 키, 혈압, 콜레스테롤 등의 데이터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건강검진 데이터는 수집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이미 축적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술로는 유전 연구에 직접 활용할 수 없어 ‘돈 드는 검사는 못하고, 돈 안 드는 데이터는 못 쓰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한 범 교수팀이 던진 질문은“이미 있는 데이터로도 유전 연구가 가능하지 않을까?”였다. 연구팀이 개발한 기술의 핵심은 ‘친척 간 닮은 정도가 가족관계에 따라 서로 다르게 변화한다’라는 생물학적 원리를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분석한 데 있다. 구체적으로, 이 기술은 두 가지 핵심 원리를 활용한다. 첫째, 유전적 상관관계는 촌수가 멀어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지만, 함께 생활하면서 형성되는 환경적 상관관계는 다른 속도로 줄어들 것이라는 ‘감쇠 속도 차이’를 이용한다. 둘째, 같은 1촌 관계라도 아버지-딸, 어머니-아들처럼 성별과 관계에 따라 X 염색체 상관관계가 달라진다는 점을 활용해, X 염색체의 유전적 기여도까지 별도로 분석할 수 있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키, 혈압, 콜레스테롤, BMI 등 총 130개 형질에 대해 유전적, 공유환경, X 염색체 요인을 나누어 분석할 수 있는 수학적 프레임워크를 구축했다.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총 12만 쌍의 가족 데이터로 검증한 결과, 기존 유전자 기반의 방법과 높은 상관관계를 확인했다. 더욱 흥미로운 발견은 ‘가족 환경’의 영향을 구체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결과는‘키’에서 나타났다. BIGFAM 분석에 따르면 키에 미치는 가족 환경의 영향은 24.5%로, 기존 쌍둥이 연구에서 보고된 수치(약 30%)와 거의 일치했다. 이는 “우리 가족이 모두 키가 큰 이유의 4분의 1 정도는 유전이 아니라 어릴 때 함께 먹은 음식, 생활습관 때문”이라는 과학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다.
또 다른 흥미로운 발견은 일부 건강 지표들이 ‘핵가족만의 특별한 환경 효과’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요산 수치나 체성분 같은 지표들은 사촌이나 조카보다는 바로 부모-자식, 형제자매 사이에서만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연구팀은 “매일 같은 식탁에서 먹는 음식, 비슷한 운동 습관 등이 직계가족에게만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 연구결과가 보여준 것은 ‘유전 vs 환경’이 생각보다 복합적이라는 사실이다. 같은 형질이라도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환경의 영향력이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BIGFAM의 가장 큰 의의는 그동안 비용과 기술적 제약으로 배제되었던 유전 연구의 영역을 대폭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유전자 검사 비용 탓에 엄두도 내지 못했던 수만 명 규모의 유전 연구가 기존 건강검진 인프라만으로도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BIGFAM은 가족 내 공유환경을 정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식습관이나 운동 같은 생활습관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하고 공중보건 정책 수립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한 범 교수는“BIGFAM은 유전 연구 접근성 확대에 한 걸음 더 다가선 혁신적 시도”라며 “값비싸고 복잡한 유전자 검사라는 진입장벽을 허물어 전 세계 어디서나 고품질 유전 연구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의료 자원이 제한된 지역에서도 기존 건강검진 데이터만으로 의미 있는 유전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된 점이 가장 큰 성과”라며 “추가 검증과 개선이 완료되면 대규모 가족 건강 빅데이터를 활용한 질병 위험 예측과 생활습관 연구가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 연구는 인용지수 16.6의 〈네이쳐 커뮤니케이션즈(Nature Communications)〉에 최근 게재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