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규(한국고등직업교육연구소 소장, 동의과학대 교수)
얼마 전 전문대학 교양교육 연구 모임에 잠시 참석한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교육학 전공자가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문적 식견을 가진 연구진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이었다. 기억나는 얘기는 대강 이렇다. “직업교육을 하는 전문대학에 특화된 교양교육이 필요한지, 아니면 그런 구분 없이 고등교육에서 교양교육은 같아야 하는지” “AI·디지털과 같은 시대 흐름을 교양교육에 어느 수준에서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 “교양교육을 통해 어떤 교육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지” 등과 같은 것이다. 사실 이 얘기는 교양교육을 넘어 교육의 본질에 관한 대단히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물음으로, 대학 탄생과 함께 해오던 고민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억을 떠올려 30년 전 내가 대학 시절 수강한 교양과목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사회대학에서 개설한 ‘문화와 제국주의’이라는 수업이었다. 역사사회학을 전공한 40대의 의욕 넘치는 교수는 비교문학의 권위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의 《오리엔탈리즘》과 《문화와 제국주의》 두 권의 두꺼운 책을 같이 읽으면서 역사사회학을 넘어 사회학적으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 관점을 알려줬다. 이 시절 나는 전공 법학을 넘어 다양한 학문적 경계를 줄타기하는 지적 유희를 즐기면서 취직과 거리가 먼 대학 생활을 했던 것 같다.
이후 대학원에서 공법을 전공하면서 나에게는 해석법학에만 매달리지 않고 사회학적·역사적 관점에서 법학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습관이 생겼다. 생각건대, 대학의 교양이 학생의 ‘교양’을 키워야 한다는 목적에 집중하는 순간 그것은 교육 성과에 매몰되는 흥미 없는 교육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대학이 어떤 목적과 방향에 따라 교양교육을 하든 학생의 수용 결과는 제각각이다. 전공을 뛰어넘은 지성에 매력을 느끼기도 하고, 새로운 어학을 배워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도구를 획득하기도 하고, 평소 접하지 못한 예술·문화를 배우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하고, 운동 하나를 배워 사회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하는 등 학생은 다양한 형태로 교양교육의 가치를 실현한다.
사전적으로 ‘교양’이란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고, 경험을 쌓으며, 체계적인 지식이나 지혜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격 전체의 훈련을 하고 축적되는 인간관·세계관·자연관 등 가치관의 총칭이며, ‘교양교육’이란 지성과 감성의 융합을 축으로 하는 인격 형성이다. 이러한 뜻의 교양을 교육으로 달성하겠다는 것은 신화 같은 일이다. 사실 교육의 세계는 신화로 가득하다. 그러므로 교육에 관해 말할 때 혹여나 신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지 주의해야 한다. 교육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없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한 새 정부에 수많은 교육 관련 정책이 제안되고 또 논의되겠지만, 그것이 국정과제로 채택돼 정책으로 시행되는 데는 지난한 과정을 요하고 또 그러해야 한다. 그것보다는 무엇을 할 수 없고, 해서는 안 되는가에 집중하고, 필요하다면 전 정부의 정책도 이어받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정책의 신뢰성을 높이는 길이다.
교양교육은 한정된 영역의 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교육을 하든 일반교육을 하든 다양한 관점에서 교육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키우는 교육일 것이다. 모든 학문 분야에 직업의 의미를 찾는 적응의 문제나 사회에서 나의 권리를 찾는 저항의 관점에서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하고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유연한 전문성’(flexpeciality)을 키우는 것이야 말로 전문대학 교양교육의 방향성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