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달승 한국외대 페르시아어·이란학과 교수
2007년 여름, 대한민국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을 경험했다. 아프간 피랍사태로 수십 명의 국민이 탈레반에 억류되었고 전세계의 시선이 한국에 집중됐다. 나라의 운명을 가를 듯한 긴박한 협상 과정에서 중심에 선 인물이 있었다. ‘선글라스맨’으로 불린 이 협상가는 이란 전문가였다. 그는 언어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상황을 읽는 능력으로 탈레반과 대화했고, 사태 수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의 존재는 위기의 순간, 언어와 문화적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는 인재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교훈은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특수외국어는 곧 ‘전략어’다. 전략어란 국가 안보, 경제, 외교, 산업 발전에 전략적 가치를 지닌 언어를 의미한다. 세계 공용어가 글로벌 소통의 기반이라면, 전략어는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기회를 선점하며 국가 생존을 지켜내는 열쇠다. 인공지능이 언어를 실시간 번역하는 시대라 해도 전략어의 가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만의 능력, 즉 맥락을 읽고 신뢰를 구축하는 역량은 더욱 중요해진다. 따라서 전략어 교육은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차원을 넘어, 국가 안보와 산업, 외교 경쟁력을 떠받치는 근간을 세우는 작업이다.
첫째, 전략어 인재는 AI의 한계를 보완한다. 대규모 언어 모델은 고빈도 데이터를 처리하는 데 강점을 가지지만 저자원 언어의 방언, 은어, 역사적 맥락을 해석하는 능력은 여전히 부족하다. 외교 문서의 완곡한 표현, 협상 과정에서 오가는 암묵적 신호, 현지 사회의 상징 체계는 단순 번역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문화적 이해와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해야만 올바르게 해석된다. 결국 전략어 전문가는 AI의 산출물을 교정하고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맥락의 정확성을 담보하는 국가적 안전망이 된다.
둘째, 전략어 역량은 산업과 기술 주권의 문제와 직결된다. 에너지·자원 협력, 인프라 건설, 콘텐츠 시장 진출 등 신흥시장에서의 성패는 초기 접근에 달려 있다. 현지 언어와 현실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치명적 판단 오류나 협상 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 전략어 인재는 단순한 통역을 넘어 리스크를 관리하고, 현지 데이터와 문화 자산을 고부가가치로 전환하는 핵심 촉매제가 된다. 한국기업의 해외진출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은 점점 더 필수적이다.
셋째, 외교 다변화의 시대에 전략어는 국익을 지키는 결정적 수단이다. 글로벌 남반구의 부상, 미·중 갈등 속 지정학적 균열은 다자외교의 복잡성을 극대화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지 언어로 직접 소통하는 능력은 단순한 정보 접근을 넘어 관계 자본을 축적한다. 언론, 학계, 종교계, 시민사회와 직접 교류하는 것은 한국의 입장을 신뢰성 있게 전달하는 통로가 되며, 위기 상황에서는 신속하면서도 정확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통역에 의존한 간접 소통으로는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전략어 인재 양성을 위한 생태계를 재구축해야 한다. 이는 단기적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고, 투자 비용도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국가의 운명을 바꿀 가장 확실한 미래 자산이다. 언어별·권역별 중장기 커리큘럼, 지역학과 연계된 융합교육, 현지 연수와 인턴십, 현장 연구, 졸업 이후 안정적 진로까지 이어지는 체계적 로드맵이 마련돼야 한다. 교육에서 현장 연구와 사회진출까지 전략어 인재가 긴 호흡의 생애 경로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냉정히 직시해야 한다. AI가 발전하는 시대일수록 언어와 문화를 해석하고 소통을 이끌어내는 인간 고유의 역량은 전략적 자산으로 남는다. 이를 외면한다면 미래의 대한민국은 또 다른 위기 앞에서 무력감을 맛볼 수 있다. 반대로 지금 투자한다면 전략어 인재는 국익을 수호하고 산업, 외교, 안보의 지평을 넓히는 핵심 자원이 될 것이다. 전략어 교육은 비용이 아니라 대한민국 미래를 여는 열쇠다. 지금 우리의 선택이 수십 년 뒤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