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대학 현실을 단 한마디로 표현하면 ‘혁신 불능’이다. 산업과 사회 전반이 격변하는데도, 대학만큼은 고요하다. 총장들이 아무리 고투를 거듭해도 개혁의 첫 단추조차 꿰지 못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혁신의 주체가 돼야 할 교수와 직원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총장은 대학의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부임한다. 그러나 상당수 총장은 취임 직후부터 벽에 부딪힌다. 교수사회의 반발, 직원들의 냉소, 한마디로 구성원의 집단 저항이 그것이다. 의욕적으로 내놓은 개혁안은 교수회의에서 묵살되고, 행정 직원의 ‘시간 끌기’ 속에 사라진다. 기업이라면 상상도 못할 풍경이 대학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반복된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이름이 무색하다.

대학 사회에 회자되는 자조 섞인 표현이 있다. “빈대 서말 쏟아놓고 다시 모으는 게 교수 세 명 의견을 모으는 것보다 쉽다.” 농담 같지만 대학의 개혁 불능 구조를 정확히 꼬집는다. 합리적 토론보다 집단적 이기주의가 지배하는 풍토에서 총장의 리더십은 번번이 무력화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구성원들이 마치 대학만은 세상의 변화에서 예외인 듯 행동한다는 점이다. 사회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학생들은 새로운 교육을 요구하지만, 교수와 직원은 “우리만은 안전하다”는 착각 속에 안주한다.

이 와중에도 묵묵히 헌신하는 극소수 교수와 직원이 있다. ‘월화수목금 금금금 야간근무’뿐만 아니라 휴일근무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적인 자들이 있기에 대학은 돌아간다. 그러나 다수의 방관과 저항은 이들의 헌신을 허사로 만든다. 회의장에서 무산되는 개혁안, 냉소 어린 시선 속에 빛을 잃는 선의. 이 불합리한 구조 속에서 대학의 미래를 진정 걱정하는 사람일수록 좌절과 피로에 짓눌린다.

왜 이런 상황이 반복되는가. 답은 간단하다. 변화가 두렵기 때문이다. 교수는 기득권을 지키려 하고, 직원은 권한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새로운 제도가 도입될 때마다 신임 교수에게만 적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기득권을 건드리면 거센 저항이 따르니, ‘선배는 예외, 후배는 희생’이라는 불합리한 관행이 굳어졌다. 이처럼 다수가 한사코 변화를 거부하는데 어떻게 혁신이 가능하겠는가.

이제는 말로만 위기 진단을 되풀이할 때가 아니다. 실제로 대학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불과 몇 년 사이 한중대, 대구외대, 서남대 등 여러 대학이 폐교됐다. 폐교 과정은 참혹했다. 수천 명의 학생은 갈 곳을 잃고 뿔뿔이 흩어졌으며, 교직원들은 하루아침에 생계를 잃고 거리로 내몰렸다. 수십 년간 몸담았던 대학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절망을 겪으면서도, 정작 많은 대학은 여전히 ‘우리만은 다르다’며 안일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폐교대학의 사례는 분명한 경고다. 혁신을 거부한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보여준다. 문제는 여전히 수많은 대학이 그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다. 변화에 둔감한 교수와 직원의 안주가 결국 학생과 동료의 삶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오늘은 남의 일일지 몰라도, 내일은 바로 우리 대학의 비극이 될 수 있다.

총장의 고투가 눈물겹다 한들, 내부 협조 없이는 성과를 낼 수 없다. 교수와 직원 다수가 기득권에 매달린다면, 아무리 경륜과 비전을 갖춘 총장이라도 혁신은 공염불에 그칠 뿐이다. 대학이 안에서부터 썩어가는 이유는 외부의 압박이 아니라 내부의 방관과 저항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뼈아픈 자기 성찰이다. 다수가 방관과 저항을 멈추지 않는 한, 소수의 헌신만으로는 대학을 살릴 수 없다. 폐교의 비극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혁신을 외면하는 다수의 무책임이 곧 대학 몰락의 씨앗이다. 지성의 전당이라는 이름을 지키려면 구성원 스스로가 변화의 길에 동참해야 한다.

혁신은 멀리 있지 않다. 교수와 직원이 마음을 열고 변화에 나설 때, 총장의 고투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지금도 수많은 총장이 절망 속에서 외치고 있다. “안주와 고집을 버리지 않으면 대학은 무너진다.” 이 같은 절규를 흘려듣는다면, 대학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 될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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