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갑 국립목포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장(경제학과 교수)
고교학점제는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돕는다는 이상적인 목표를 넘어, 초·중·고 교육 생태계 전체를 혁신할 잠재력을 가진 제도로 평가받았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수동적으로 수업을 듣던 과거와 달리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따라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이수하고 누적 학점이 기준에 도달하면 졸업을 인정받는 방식이다. 이는 획일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의 학습 동기와 흥미를 유발하고, 자기 주도적 학습 역량을 키우는 진정한 맞춤형 교육을 실현하려는 취지를 담고 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시작된 고교학점제는 서열화된 고교 체제와 경쟁 중심의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히며, 도입 초기부터 수많은 쟁점과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다.
고교학점제의 핵심 쟁점: 이상과 현실의 괴리
고교학점제를 둘러싼 가장 근본적인 쟁점은 제도 설계의 핵심 전제가 무너지면서 발생한 정책적 모순이다. 본래 고교학점제는 ‘고교 서열화 해소’와 ‘내신 절대평가(성취평가제)’ 도입을 핵심적인 축으로 하는 ‘패키지 정책’으로 구상됐다. 문재인 정부는 자율형사립고·외국어고·국제고(이하 자사고·외고)를 2025년까지 일반고로 전환해 고교 체제를 수평적으로 개편하고, 이후 내신 경쟁 부담이 없는 성취평가제를 전면 도입해 학생들이 자유롭게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토양을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현 정부가 자사고·외고 존치 정책을 확정하고, 2028학년도 대입제도 개편안에서 내신 상대평가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하면서 정책의 기본 전제가 완전히 훼손됐다. 고교 서열화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내신 절대평가를 도입할 경우, 이는 대입에서 자사고·외고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고교 체제 개편이 무산되면서 고교학점제의 성공을 담보할 가장 중요한 장치였던 성취평가제 도입 역시 좌초된 것이다. 이처럼 서로 충돌하는 정책들이 뒤섞이면서 고교학점제 운영의 책임과 부담만 고스란히 일반고에 전가되는 모순적인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학생의 성장과 흥미를 위한 교육이라는 제도의 이상은 서열화된 대학 입시 제도 앞에서 왜곡되고 있다.
고교학점제의 현주소: 혼란 속의 첫걸음
올해 고등학교 1학년부터 전면 시행된 고교학점제는 한 학기를 마친 현재, 학교 현장에서 극심한 혼란과 불만을 낳고 있다. 학생들은 3년간 총 192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으며, 과목별로 ‘출석률 3분의 2 이상’과 ‘학업성취율 40% 이상’이라는 두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학점 취득(이수)이 인정된다. 특히 이전에는 없던 ‘학업성취율’ 기준이 새롭게 추가되면서 이것이 현장 혼란을 가중시키는 핵심 요인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장의 혼란을 줄이기 위해 교육부는 최근 ‘고교학점제 운영 개선 대책’을 발표했다. 대책의 핵심은 교사들의 업무 부담을 덜어주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먼저, 학업성취율 기준에 미달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보충지도 시수를 기존 1학점당 5시간에서 ‘3시간 이상’으로 대폭 줄였다. 또한 복잡했던 출결 관리 권한을 과목 담당 교사와 담임 교사가 함께 갖도록 하고, 공통과목의 학교생활기록부 기재 분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등 교사들의 행정 부담을 완화하는 조치도 포함됐다. 더불어 내년도 중등교원 신규 채용 규모를 전년 대비 1600여 명 늘린 7100여 명으로 확대해 교·강사 인력을 확충하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하지만 이 개선안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등 일부 교육 단체들은 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현장의 부담을 덜어주는 현실적인 조치라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반면, 전교조 등 교원 단체들은 학생에게 낙인효과를 주는 ‘미이수제’의 근본적인 폐지를 요구하며, 이번 대책이 미봉책에 불과하다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고교학점제가 노출한 문제점
고교학점제는 제도 설계의 전제가 무너지고 대학 입시와의 괴리가 심화하면서 여러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첫째, 학생 선택권의 왜곡과 입시 종속 심화다.
고교학점제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의 과목 선택권이 본래 취지와 달리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와 흥미보다는 당장 내신 등급을 잘 받을 수 있는 과목, 즉 수강생이 많아 상대평가에서 유리한 과목으로 쏠리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결국 ‘학생 선택권 보장’이라는 제도의 핵심 가치는 사라지고, 고교학점제는 입시 경쟁을 위한 또 다른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둘째, 조기 진로 결정 부담과 실질적 선택권의 제약이다.
학생들은 1학년 때부터 진로와 연계된 과목을 선택해야 하므로 너무 이른 시기에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감이 크며, 한번 결정한 진로를 중간에 바꾸기도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더욱이 학교 현장에서는 다양한 선택과목을 운영할 교·강사 인력과 시설 인프라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실제 학교 현장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과목은 매우 제한적인 상황이다. 한 연구는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운영되려면 교원이 8만 명 더 필요하다고 추산했으며, 2021년 기준으로 학점제형 공간 조성이 완료된 일반고는 전체의 45%인 756개교에 불과했다.
셋째, ‘미이수’ 제도 도입에 따른 현장의 혼란이다.
새롭게 도입된 ‘학업성취율 40%’ 이수 기준은 학교 현장에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의 부담이 크게 가중됐다는 점이다. 자칫 졸업을 못 할 수도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으로 인해, 일부 학생들은 학업 자체를 포기하거나 심지어 자퇴를 결심하는 사례까지 발생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성적 미달 시 별도의 보충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학생들에게 ‘낙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 또한 크다. 나아가 학교 입장에서는 ‘미이수 학생이 많은 학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피하고자 시험 난이도를 의도적으로 낮출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는 결국 전체 학생의 학력 수준을 하향 평준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넷째. 교원 업무 부담의 폭발적 증가다.
다양한 선택과목 개설 및 운영, 미이수 학생을 위한 보충 지도, 복잡해진 출결 관리와 늘어난 학교생활기록부 작성 부담 등으로 교사들의 업무가 과도하게 가중되고 있다. 이는 교사들이 수업 연구와 학생 지도라는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기 어렵게 만드는 심각한 문제다.
선 방향 제안: ‘기본교육 지역캠퍼스’ 모델로의 전환
현재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제도 보완을 넘어선 종합적인 개편이 시급하다. 특히 개별 학교 단위로 학점제를 운영하는 방식은 과목 개설의 다양성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새로운 대안 모델을 모색해야 한다. 그 대안으로 ‘기본교육 지역캠퍼스’ 모델을 제안한다. ‘기본교육 지역캠퍼스’란 개별 학교의 한계를 넘어 ‘지역 전체’의 교육 생태계를 전환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이는 단순히 고교학점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우리 사회가 직면한 불평등, 인구 위기, 디지털 전환 등의 시대적 과제에 대응해 ‘깨어 있는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기본교육’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구체적 방안: 인구 40만 명 기준 8~10개의 인접 고등학교를 하나의 ‘고교학점제 네트워크’로 구성하고, 각 학교는 특정 교과목 군을 전문적으로 특성화해 운영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소속 학교와 관계없이 네트워크 내에 개설된 모든 과목을 자유롭게 선택하여 자신만의 교육과정을 설계할 수 있다.
△지원 체계 구축: ‘지역교육센터’를 설립해 캠퍼스 전체의 교육과정 연계, 온라인 수업 공유, 학생들의 이동을 돕는 셔틀버스 운영 등을 총괄 지원함으로써 학생들의 선택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한다.
△통합 교육 생태계: 궁극적으로는 초·중학교까지 연계해 지역의 모든 학교가 일관된 교육 철학 아래 함께 성장하는 통합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을 지향한다.
물론 이러한 모델이 성공적으로 안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근본적인 개혁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무엇보다 내신 전 과목 성취평가제(절대평가)의 전면 도입을 통해 학생들이 입시 유불리가 아닌 자신의 성장을 위해 과목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또한 자사고·외고 문제로 고착화된 고교 서열 구조를 완화하고, 수능의 자격고사화 등 대입 제도를 고교학점제와 연계해 개편하는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고교학점제는 우리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서열화된 고교 체제와 경쟁 중심의 입시 제도라는 근본적인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이 제도는 학생 성장의 디딤돌이 아닌 학교 현장의 또 다른 부담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제는 단기적인 처방을 넘어 교육의 본질을 바로 세우기 위한 용기 있는 결단과 일관된 정책 추진이 절실한 때다.
<한국대학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