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

김학준 단국대 석좌교수는 1943년생으로 인천대 총장, 동아일보사 회장, KAIST 김보정석좌교수,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한국교총) 회장 등을 역임했다.

다른 달들도 그러하지만, 특히 10월은 우리 겨레에게 매우 상서로운 달이다. 우선 3일은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뜻의 개천절이다. ‘신화’이냐 ‘실존’이냐의 논쟁이 뒤따르기는 했으나, 대한민국의 대다수 국민은 ‘국조(國祖) 단군할아버지’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나라를 세웠으며 그 날을 개천절로 기념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정부는 지난 3일에 국무총리 참석 아래 제4357년 개천절 경축식을 열었다. 단군이 나라를 세운 날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역사가 4357년을 기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고려 충렬왕 때 국존(國尊)으로 추대된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따르면, 환인(桓因)이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 환웅(桓雄)을 땅으로 내려보냈다. 환웅이 땅으로 내려오자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청함에 환웅이 그들에게 굴 속에서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쑥과 마늘을 먹고 견디라고 했는데, 곰만이 그대로 해서 인간세계의 여자로 태어났으니 그 여자가 곰녀 곧 웅녀(熊女)이고, 환웅이 웅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으니 그가 곧 단군이다.

일연의 이 글이 고려말에 등장한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몽골의 침략을 받고 원(元)의 간섭을 받는 굴욕적인 상황에서, 국가의 역사적 뿌리를 찾아 그것을 중심으로 내부적 단결을 굳게 하자는 구국적 발상에서, 다시 말해, 정신적 구심점을 찾아 국가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자는 뜻에서 단군을 국가의 시원으로 제시한 것이다.

일연의 이러한 뜻은 후대에 계승됐다. 대한제국 말기에 더욱 거세진 일제의 침략에 따라 나라의 앞날이 매우 어두워지자 신채호(申采浩) 선생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은 단군의 건국정신을 상기시키며 항일대열로의 민족적 결집을 호소한 것이다.

비슷한 현상을 북한에서 발견하게 된다. 처음부터 단군을 철저히 부인하며 인민들에게 사회주의를 이념적 중심으로 내세우던 북한 정권은 1989년 가을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발점으로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정권들이 줄을 이어 무너지고, 마침내 소련마저 해체되는 현실에 직면하자 1993년 9월부터 김일성과 김정일이 나서서 단군의 ‘실체’를 인정하고 단군릉을 개건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이한 해석과 통일방식을 제의했다. 단군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평양에, 웅녀를 ‘남조선’과 서울에, 호랑이를 ‘미 제국주의’에 비정하고, ‘남조선’은 미국을 몰아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손잡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이다. 

3일의 개천절과 9일의 한글날을 보내고 새로운 감회에 젖는다. 조선왕조 4대 군주 세종은 1444년 1월(음력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고, 1446년 10월(음력 1446년 9월)에 반포했다. 반포할 당시에는 주로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글이라는 뜻에서 세종 스스로 언문(諺文)이라고 불렀고, 자연히 그 이름이 널리 쓰였다. 그 기점에 대해 논란이 뒤따르기는 했으나,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의 애국지사 주시경(周時經) 선생이 ‘한글’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이 이름이 정착됐다. 북한에서는 ‘조선글’이라고 부른다.

남과 북이 그 명칭에서 차이를 보이듯, 기념일에서도 차이를 나타낸다. 남은 반포일을 1446년 10월 9일로 간주해 이 날을 기념일로 정해 올해는 제578돌이 된다. 북은 창제일을 1444년 1월 15일로 간주해 이 날을 기념일로 정했다. 그러나 남이 한글날을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을 포함해 5대 국경일의 하나로 포함시켜 성대한 행사를 치르는 것에 비해 북은 사실상 거의 아무런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

한글은 배우기가 무척 쉬운 글자여서 국민 대다수는 물론이고 서양어권에서도 배우는 사람의 수(數)가 부쩍 늘고 있다. 더구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기업활동이 세계화되면서 취학과 취업을 위해 한글을 배우는 사람이 날로 늘고 있다. 한국이 인터넷 활용에서, 그리고 정보화에서 세계 1위라는 평을 받고 있는 배경에는 바로 한글이 있다. 새삼 세종대왕에 경의를 표하고, 어려운 여건 아래서도 한글을 지키며 다듬어온 선현들을 다시 기억하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낳은 유엔 창립 80주년
한글날 578돌을 보낸 때로부터 보름이 지난 10월 24일에 유엔 창립 80주년을 맞이했다. 2차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5대 연합국이 주축이 되어 1945년 10월 24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곧 유엔을 창립했다. 지난 9월 23일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유엔총회 연설에서 유엔이 세계평화를 위해 그동안 뭘 했느냐고 격한 어조로 공격했다. 

유엔이 그러한 비난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중국 등 5대 상임이사국은 모두 각자의 국가 이익에 몰두해 세계평화를 위한 큰 걸음을 걷지 못한 경우가 허다했다. 비록 그렇다고 해도, 우리 대한민국으로서는 1948년 5월 10일의 총선거를 통해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지게 했고, 1948년 12월 12일의 유엔 제3차 총회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사실상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 또한 1950년 6월 25일의 결의로 소련과 중공의 지원 아래 북한이 자행한 남침전쟁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유엔 회원국의 파병을 결정했고, 1950년 10월 7일에는 한국의 통일과 부흥을 위한 유엔기구, 곧 언커크(UNCURK)를 창설한 일들을 잊을 수 없다. 이후에도 유엔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중화민국을 대체해 5대 상임이사국으로 진출한 1971년까지 매년 총회에서 대한민국 주도 아래 한반도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6·25전쟁 때 38선을 처음 넘어 북진을 시작한 ‘국군의 날’
바로 앞에서 썼듯, 6·25남침전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붕괴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유엔의 결의에 따라 서방 16개국이 참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활력을 얻게 됐고, 마침내 1950년 10월 1일에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는 이 날을 ‘국군의 날’로 제정해 기념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조직된 1940년 9월 17일을 ‘국군의 날’로 제정해야 한다고 제의하며, 그 제의는 일정하게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이 토론은 뒷날로 미루기로 하고, 10월 들어 첫날에 맞는 이 날을 대한민국이 소생한 날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들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반드시 풀어나갈 것이다. 그만한 저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싸워온 창조와 개척의 정신을 발휘하도록 하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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