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동결에 등록금 수입 1조 감소… 인문사회 연구비는 국가 R&D의 1%
연구비 끊긴 박사들, 강사로 이동… 교수 충원 중단에 학과 통폐합도 확산
전문가 “AI시대일수록 인문사회 기반 필수…연구토양 회복이 대학 경쟁력”

사진=아이클릭아트
사진=아이클릭아트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등록금 동결이 17년째 이어지는 가운데 인문사회 연구비마저 줄어들면서 국내 후속세대 연구자 배출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재정난을 겪는 대학들이 많아지면서 인문사회 연구 생태계는 사실상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 예산 역시 인공지능(AI) 등 기술 중심으로 쏠리면서 학문적 불균형이 위험 단계로 치닫고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13일 교육계에 따르면 정부가 지난 2009년 대학 등록금 인상을 억제하는 정책을 시행한 이후 대학들은 사실상 17년간 등록금을 올리지 못한 채 운영을 이어오고 있다. 대학의 재정 능력 역시 급격히 떨어져 2014년 약 13조 8000억 원이었던 전체 등록금·수강료 수입은 10년 만에 약 1조 원 이상 줄었다.

이하운 한국사학진흥재단 이사장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사립대는 대부분이 학교 운영비의 60% 이상을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어 사정이 더 심각하다”며 “물가와 인건비, 연구비는 계속 오르는데 등록금은 17년째 제자리걸음이라 대학 재정은 해마다 마이너스로 기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대학 현장에서는 등록금 동결 장기화가 특히 인문사회 분야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대학들이 재정난을 겪으면서 연구비 축소·삭감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논문 실적을 기반으로 승진·재임용해야 하는 인문사회 분야가 가장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지방의 한 국립대 기획처장 A씨는 통화에서 “등록금 동결이 길어지면서 대학이 각 학과에 지원하던 연구비를 줄이거나 아예 끊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자연과학·공학 분야는 비교적 연구비를 외부에서 확보할 길이 있지만 인문사회는 대부분 대학의 기본 연구비에 의존해 논문을 준비할 수밖에 없어 치명적”이라고 설명했다.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에서도 인문사회 연구는 입지가 좁아지는 추세다. 교육부에 따르면 내년 인문사회 분야에 배정된 기초연구 예산은 약 3286억 원, 전체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반면 이공계 연구에는 인문사회 분야의 두 배에 달한다. AI 중심의 과학·기술 연구가 중요하다는 흐름을 고려하더라도 인문사회 분야가 지나치게 뒤처져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부산의 한 사립대 사학과 교수는 본지에 “연구비가 끊긴 박사들이 연구를 포기하고 강의 전담이나 시간강사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며 “대학원생들도 인문사회 박사를 해도 연구할 자리가 없다는 인식이 퍼지는 탓인지 박사 진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늘었다”고 말했다.

■ 신규 임용 사라지고 강사 대체 늘어 = 교수 채용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인문사회 계열은 신입생 충원율 하락과 정원감축 압박 등으로 신규 교수 임용이 사실상 멈춘 분위기다. 특히 국립대보다는 사립대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분석이다.

전호환 전 부산대 총장은 “등록금 동결이 대학 재정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나마 국립대는 교수 인건비가 국비로 지원되고 교육부가 정원을 유지해주기 때문에 기본적인 교수 충원은 보장되는 편”이라며 “반면 사립대는 학생 모집이 안 되면 폐과가 되고 학과 교수만 남게 된다. 정원감축과 학과 구조조정이 교수 충원을 가로막는 핵심 요인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 전 총장은 “그렇다고 등록금을 인상하는 것 역시 지방대 입장에선 선택하기 어려운 카드”라며 “등록금을 올리면 수도권 대학과 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지방대 등록금이 높아지면 학생들이 올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일부 대학들은 이미 학과 통폐합이 진행되는 상황이다. 학생 수가 줄고 교수도 부족해 학과를 독자적으로 운영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여러 학과를 합치거나 비슷한 전공끼리 묶어 단일 학부로 바꾸는 일이 잦아지면서 인문사회 계열이 대학에서 설 자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상황이다.

서울 소재 한 사립대 교무처장 B씨는 “학과에 교수 한 명 떠나면 예전 같으면 자리를 곧바로 채웠다”며 “하지만 지금은 교수 충원이라는 말 자체가 사라졌다.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강사나 시간강사로 수업을 커버하는 형태”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교수는 연구, 논문, 세미나, 학과 운영 등을 책임지지만 강사는 대부분 수업만 한다”며 “교수가 줄어든다는 것은 학과의 장기적 성장을 이끌 기반이 사라지는 걸 의미한다. 당장만 보면 강사로도 수업은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추후에 학문 자체가 유지되지 못하고 어느 순간 문을 닫게 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 AI 시대일수록 인문사회 기반 중요 = 전문가들은 최근 인문사회 전공의 취업률이 낮아서 생기는, 이른바 시장주의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인문사회 분야가 모든 학문에서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해당 영역의 약화는 고등교육 생태계 전체에 악영향을 초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다. 특히 AI 시대가 빠르게 다가오면서 윤리·법제 정비 등 인문사회 전문성이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이란 점에서도 학문 붕괴를 심각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기우 전 교육부 차관은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을 만드는 인재는 대부분 행정·법·사회복지 등 인문사회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인문사회 인력 풀(pool)이 줄어들면 정책의 깊이와 다양성이 떨어질 수 있다”며 “최근 빠르게 성장하는 문화·콘텐츠 산업도 인문사회의 해석·기획 능력 위에서 움직인다. K-콘텐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이유도 사람 이야기를 다루는 인문사회 계열이 담당해온 영역”이라고 설명했다.

이 전 차관은 이어 “AI 기술 자체는 공학·컴퓨터과학이 주도하지만 AI 윤리나 사회적 합의 등은 기술만으로 해결할 수 없고 인문사회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라며 “AI 시대일수록 사람을 이해하는 인문사회 능력이 더 많이 필요로 하는데 정작 대학에서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문제”라고 덧붙였다.

대학 현장에선 강사·비정규교수에게 연구비 지원이 거의 제공되지 않고 있는데 제도를 개선해 이들에게 연구를 이어갈 기반을 만들어주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중렬 전남대 국어국문학과 강사는 “인문사회 분야 강사·비정규교수를 지원하는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제도를 확대해 대학에서 학문 연구가 유지되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해법이 될 수 있다”며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를 마련해야 인문사회 분야 후속세대가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밭이 비옥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데 비가 오지 않고 흙이 계속 마르기만 하면 아무리 좋은 씨를 뿌려도 자라지 못한다”며 “대학 경쟁력, 글로벌 순위, 교육의 질을 이야기하기 전에 기본이 되는 연구 기반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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