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능마다 일부 시험장서 보건실을 별도 고사실로 전환 관행 반복
공황·실신·고열 수험생도 ‘일단 시험부터 봐야 한다’ 분위기 팽배한 탓
전문가들 “수능 만능주의가 초래한 부작용… 국가시험은 안전이 최우선”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도 보건실이 별도 고사실로 쓰이는 관행이 반복되면서 응급 환자가 치료 기회를 놓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교육 현장을 중심으로 제기된다. 현장 보건교사들은 “고열이 나도 수능은 봐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압박이 낳은 부작용”이라며 “수능 만능주의가 교육 현장의 응급 대응 시스템을 약화시키고 있어 개선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24일 교육계에 따르면 올해 수능 시험장으로 지정된 일부 학교에서 보건실을 시험실로 전환해 운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현행 규정에 따라 수험생이 보건실에서 시험을 치러야 할 경우 보건교사는 시험지를 배부하고 감독을 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시험실에서 수험생이 긴장으로 어지러워하거나 실신하는 경우 응급조치도 해야 하는 탓에 시험 감독과 응급 판단 모두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실제로 올해 한 시험장에서는 수능 시작 직전 복도를 걷던 한 수험생이 갑자기 힘이 빠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보건교사가 급히 달려가 상태를 살폈고 긴장과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순간적으로 기절하는 미주신경성 실신 증상을 보인 것이다. 다행히 잠시 안정을 취하면 시험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내려졌다.
하지만 문제는 학교 측에서 학생이 보건실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도록 임시 고사실로 사용하도록 지시했다는 점이다. 해당 학교의 보건교사 A씨는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보건실은 응급 환자가 언제든 들어올 수 있도록 상시 개방돼야 하는 공간”이라며 “학교 관리자에게 응급 상황에 대비하려면 보건실 출입을 막을 수 없고 차라리 별도 고사실을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A 교사는 이어 “실신했던 수험생은 안정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쉬는 시간마다 다른 학생이 들락날락하는 보건실 안에서 시험을 치러야 했고 저 역시 응급 대응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시험 감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졌다”며 “학생은 시험 중 여러 방해를 겪었지만 ‘이 일로 문제 삼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작성한 뒤 조용히 퇴실했다”고 주장했다.
다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로 수능 아침 한 수험생이 영어 듣기평가를 앞두고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뛰며 공황 증상을 보였다. 학생은 긴장과 압박 때문에 시험실에 있기가 어렵다며 보건실에서 혼자 시험을 보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진단서를 미리 제출해 둔 상태라 학교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해당 학생은 영어 시험이 끝나자 다시 일반 고사실로 돌아가 탐구 영역을 치른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학교 보건교사 B씨는 통화에서 “보건실이 불안하거나 힘든 순간만 잠시 머물렀다 돌아가는 임시 고사실처럼 쓰인 것”이라며 “응급하지 않은 질환이라도 진단서를 근거 삼아 특정 시간 보건실 내 시험 요구 시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B 교사는 이어 “보건실 문 앞에서 응급 상황이 있더라도 시험을 감독하는 동안에는 보건교사는 시험을 멈출 수도, 응급 학생을 그대로 둘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 높인다”며 “보건실이 시험실로 전환되면 원래 있어야 할 응급 대응 기능은 사실상 정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보건실, 고사실 아냐” 교육청 인정에도 현장은 그대로 = 본지 취재 결과, 교육 당국도 보건실이 시험실로 적절치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시교육청이 올해 수험생들에게 배포한 ‘별도의 시험실 응시에 따른 동의서’를 보면 “특히 보건실은 응급상황이나 소음이 발생할 수 있음”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통상적으로 조용해야 하는 시험실의 조건과는 보건실이 애초에 맞지 않다는 점을 교육청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교육 현장에선 여전히 많은 학교들이 여전히 보건실을 수능 시험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 입을 모은다. 감독 인력 부족이나 공간 확보의 어려움 때문이다.
서울 광진구의 한 고등학교 교사 C씨는 본지에 “오래된 학교일수록 빈 교실이 거의 없고 특별실도 이미 다른 용도로 꽉 차 있는 경우가 많다”며 “학교 입장에선 쓸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 보건실밖에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 교사는 이어 “별도 고사실을 만든다고 해도 감독관을 추가로 배정해야 하는데 시험 하루 전까지도 인력 배치가 빠듯한 경우가 적지 않다”며 “보건교사 한 명이 보건실에서 시험을 감독하면 추가 인력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는 학교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학교 현장의 한계를 악용해 최근 수험생들이 자주 찾는 온라인 커뮤니티나 SNS 등에서는 “보건실에서 혼자 조용히 시험 보고 싶다. 일부러 배가 아픈 척하거나 컨디션이 나쁜 것처럼 행동해도 되느냐”를 묻는 글들도 올라오고 있다.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보건실이 조용하고 편한 시험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박주영 평산초 보건교사는 “보건실은 아픈 학생의 상태를 판단하고 응급 대응을 위해 준비된 공간이지 시험 편의를 맞춰주는 공간이 절대 아니”라며 “응급처치가 정말 필요한 학생이 적시에 도움을 받지 못할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 혼란의 근본적 원인은 ‘수능 만능주의’ = 전문가들은 우리 사회 전반에 이른바 ‘무슨 일이 있어도 수능은 봐야 한다’는 분위기가 여전히 팽배한 것이 원인이라는 입장이다. 실제로 매년 수능일만 되면 ‘열이 조금 있는데 시험만은 보게 해달라’ ‘병원에서라도 시험 칠 수 있게 방법을 찾아달라’ 등 민원이 학교로 쏟아져 들어오는 실정이다. 시험을 치르지 못하면 한 해를 날린다는 두려움이 워낙 크기 때문에 수능 자체가 우선되는 문화가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김수연 영산대 교육부총장은 “아프면 치료를 먼저 받는다는 너무나 기본적인 상식조차 수능 앞에서는 예외로 취급되는 사회 분위기가 문제의 핵심”이라며 “수능 중심의 문화가 바뀌지 않는다면 교육 현장의 혼란은 매년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주영 교사는 “시험 도중 컨디션이 나빠지는 상황은 언제든 생길 수 있다. 이들을 위해 별도의 공간인 예비 고사실을 사전에 반드시 확보하도록 법적·제도적으로 의무화해야 한다”며 “보건교사는 학교에서 유일하게 응급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전문 인력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시험 감독을 맡기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교사는 이어 “수능은 국가가 운영하는 시험”이라며 “국가시험이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안전이다. 수능을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학생 안전과 응급대응 시스템도 가장 우선에 두고 제도적 개선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