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 정년은 지켜지지만 승진은 멈춰 있다
“워라밸은 만족하지만… 업무에 의미가 없다”
공채라는 벽 넘어도… 다시 시작되는 불안감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시험은 붙었지만 그때부터 정체된 시간이 시작됐죠.”
지방으로 이전한 교육 분야 공공기관에 입사한 지 3년이 된 김재윤(29·가명) 씨는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과 속에서 점차 동력을 잃어간다. 김 씨가 맡는 업무는 입사했을 때와 지금이 크게 바뀐 것 없이 비슷하다. 매월 정해진 양식대로 결산 보고서를 쓰고 출장비를 정산하는 게 그의 주 업무다. 그는 “일은 편하지만 커리어가 쌓인다는 생각이 안 든다”며 “이 상태로 30대, 40대가 된다고 상상하면 솔직히 막막하다”고 했다.
29일 본지 취재를 종합하면 정년 보장을 이유로 공기업을 선택했던 청년들을 중심으로 입사 후 회의감이 든다는 경우가 점차 확산하는 분위기다. 공공기관·공기업 특유의 조직문화와 승진 체계에 대한 불편함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민간 기업보다 워라밸은 낫지만 일의 의미나 성장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공채라는 벽을 넘어서도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대학생·청년층이 공공기관·공기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정년 보장, 규칙적인 근무 시간, 예측 가능한 복지 제도 등이다. 실제 본지 취재로 만난 신입사원들도 공공기관·공기업의 워라밸은 분명한 장점이라고 입을 모았다. 칼퇴근 문화, 유급 휴가 사용의 자유, 주말 출근이 없는 근무 환경 등에 대해선 민간 기업과 비교해 공기업만의 확실한 차이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취재를 통해 접한 신입사원들이 마주한 현실은 이 같은 기대, 장점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들은 워라밸 이면에 있는 업무의 정체성이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 “시간만 보내면 승진”… 신입들의 정체감 = 서울시 산하 공공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신입사원 A씨는 “입사한 지 2년이 지났지만 업무는 거의 그대로”라고 말했다. 그는 “3년 차인데 여전히 같은 팀, 같은 보고서, 같은 회의만 반복하고 있다”며 “비슷한 시기 다른 공기업에 취업한 동기들끼리 농담처럼 우리 회사는 시간만 보내면 승진하는 곳이라고 말한다”고도 했다.
실제로 공공기관에서는 근속연수가 오래된 직원일수록 승진 기회가 열려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신입사원의 경우 사실상 대기 인력처럼 배치(혹은 방치)되는 일이 흔했다. 5급으로 입사하더라도 팀장급 이상으로 올라가는 데에 10년 이상이 걸리는 구조다.
충남의 한 공기업에 다니는 B씨도 “회사 생활이 너무 평온하다 못해 정체된다”며 “주어진 일은 늘 똑같고 새로운 시도에 대한 격려나 피드백도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곳에선 성실하게 일하는 것보다 조용히 지내는 게 유리하다”고 덧붙였다.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컨설팅을 진행하는 한 업체 담당자는 “성과보다 연공서열이 승진에 영향을 미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있다”며 “신입사원, 저연차 직원들의 피로감이 빠르게 누적되는 이유”라고 설명했다.
이렇듯 실적이 사실상 평가나 승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도 신입·저연차 직원들의 동기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블라인드 등 직장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커뮤니티에서도 “열심히 일해봤자 고과 반영이 없다” “승진은 그냥 돌아가면서 한다”는 반응이 많다.
변화에 보수적인 공공기관·공기업 특유의 구시대적 조직 분위기가 요즘 주류를 이루는 MZ 세대와 부딪치는 원인이 된다는 해석도 나온다. 상명하복의 의사결정 구조, 연공 중심의 문화, 제안이 수용되지 않는 수직적 분위기 등은 MZ 세대와 문화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조직문화에 대한 불만은 민간 기업으로의 이직이나 공기업 간 인사이동이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물론 공공기관·공기업에서 민간 기업으로 이직하는 경우는 일부다. 대부분은 공기업에서 다른 공기업으로 수평적 이동을 선택한다. 정년이 보장되는 상황 안에서 조금 더 좋은 조건, 조금 더 나은 조직문화를 찾아 이동하는 현상이 과거보다 활발해졌다는 현장 목소리가 나온다. 대학생·청년층에게 있어 공기업이 안정을 주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것만이 삶의 동력이 되는 시대는 이제 아니라는 의미다.
본지가 만난 대학생·청년들은 취재로 알게 된 이같은 현실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공기업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유는 단 하나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 정년은 지켜주지만 커리어는 묶어놓는 ‘정년 족쇄’ = 박현경 동서울대 교수학습지원센터장(교육학 박사)은 이날 본지 통화에서 “우리 사회는 초등교육부터 ‘실패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주입한다”며 “이 결과 청년들은 불확실성을 감내하기보다는 낙오하지 않을 확실한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공기업의 정년 보장이라는 장점이 오히려 지금의 청년들에겐 자신의 경로를 설계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박 센터장은 “공기업에 입사한 이후에도 낙오자로 찍힐 것을 두려워하는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결국 일이 재미없고 커리어가 막혀 있어도 붙잡고 있는 이유는 여기서도 못 버티면 끝이라는 불안 때문이다. 정년 보장이 오히려 이들의 족쇄가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누군가에겐 이상적인 직장일 수 있지만 모두에게 정답이 돼서는 곤란하다”며 “붙고 나면 끝이 아니라 붙고 나서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인지를 묻고 고민해야 할 때다. 진로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 시스템이 마련될 때 대학생·청년들은 비로소 안정보다 방향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